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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연]월야환담

8기


글쓴이: Y

등록일: 2012-08-28 23:49
조회수: 421
 
수연은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돌아왔고, 주변의 친구들은 그런 그를 오해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물론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수연의 이후의 학교생활은 다시금 평범했고, 차분하게 돌아왔다. 애쉴리와의 관계 역시도 예전보다 꽤나 친밀해졌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내일 보자.”
“으응.”

오늘도 애쉴리는 수업이 끝나자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꽤나 피곤해 보였다. 몸 상태 역시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다.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해도 극구 거절하는 통에 정확한 진단도 어려웠다. 그리고 아마도-사견이지만-진단을 한다 해도 그 원인은 찾기는 꽤 어려울 것이다.

심란하다, 라는 감정,
수연으로썬 꽤나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다.

“후우,”

어느덧 교실은 텅 비었다.
고개를 좌우로 몇 차례 저은 수연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홀로 가방을 멘다.
고민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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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Knight에게,

아홉 시에 옥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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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쪽지가 손에서 살짝 구겨진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수연의 눈빛은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차분했다.












학교 옥상은 보통 늦은 시간이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잠겨 있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우연히도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다.

- 우연히도.. 아니, 우연은 아니겠지..

후후,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수연은 옥상의 차가운 공기 안으로 자신의 몸을 한 걸음 들이밀었다.

“어서오세요.”
“고귀한 아가씨가 남자를 부르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군요. 앨리스 선배.”
“무례를 용서하시길, 주변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만월이 찬 한밤중의 먼 하늘을 바라보는 금발 소녀의 뒷모습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소녀가 고개를 돌려 아름다운 두 큰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음에도 수연의 눈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제 이름은 앨리스 드 로렌 아르노,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낸 것, 아르노 가문의 이름으로 다시 사과드리죠.”
“이 시간에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꽤나 단도직입적이시군요.”

앨리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린다.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지만, 수연의 눈은 그 미소가 작위적임을 단번에 간파한다.

“제가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것은, 당신을 ‘고용’하고 싶어서에요.”
“..전 누군가에게 고용되고 말고 할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한 가지만 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니까요.”

피고용인 생활은 진즉에 끝났다. 다시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몸상태도 못된다.
..물론 그 이야기를 굳이 앨리스에게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조금은 장단에 맞춰줄 필요도 있다.

“어떤 ‘간단한’ 일을 원하죠?”
“나와 함께, 어떤 아이를 파멸에 몰아넣으면 되는 일이죠.”
“......”
“표정이 좋지 않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그 일을 방해하지만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수연은 흥미가 동한다, 라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읽은 앨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만약 수락한다면, 선배는 제게 뭘 해 주실 수 있죠?”
“아르노 가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 드리죠.”

잠시 동안 고민하던 수연이 천천히 입을 열 때까지, 앨리스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했다.

“한 사람을 제 앞에 데려와 주셨으면 좋겠네요.”

사람 찾기라면 조건은 어렵지 않다.
눈앞의 상대의 감정은 여전이 읽기 힘들지만, 상대방의 조건까지 나온 이상 거래는 성사된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앨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로라 메이거스. 제게 삶의 의미를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죠. 한때는 한 시도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지금은 과거의 기억 중 하나로 전락해버렸어요.”
“옛 연인이라도 되나보군요. 좋아요. 당장 전 세계에 사람을 풀어 수소문해 드리죠.”

씨익, 수연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하지만 그의 입가가 그려낸 호선은 기쁨의 웃음이 아닌, 명백한 조소였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일 년 전쯤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뭐.. 라고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 가문의 힘으로 사후세계의 문을 열고 그녀를 정말로 내 앞에 데려와 주신다면, 제 손으로 직접 애쉴리를 나락에 떨어뜨리고, 가장 끔찍한 표정을 짓는 순간에 그 목을 잘라 바치죠.”
“..무슨..”
“당신이 뭘 원하는 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크큭..”

말 그대로 놀림거리가 되어버리고 만 앨리스,
그녀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찼지만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수연은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앨리스 선배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해본 적이 없으신가보군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요?”
“당신의 눈빛에서 비친 ‘자신감’이 알려주더군요.”

상대는 아얘 처음부터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상대가 말려든다고 생각한 앨리스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

“죄송하지만 전 그런 오만한 눈빛을 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과거의 기억,
그 비탄의 기억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전 태어나서 단 한번도, 원하는 것을 얻는데 성공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거기에 실린 감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었다.
하지만 수연의 표정은 그것조차도 절제한 듯,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지금까지 제가 얻고 싶어 한 것들은 세상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결심했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원하지 말자. 라고 말이죠.”
“그런 궤변이..”
“선배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군침 흘릴 만한 카드들을 가지고 있겠지만 죄송하게도 제게 맞는 카드는 없는 듯하군요.”
“..후회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어요!!”

분을 참지 못한 노여움 가득한 목소리가 밤하늘 가득 울려퍼진다.

“기대하죠.”

앨리스를 향한 시선을 끝까지 유지한 채 뒷걸음으로 옥상을 벗어나며 수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후우, 슬슬 떠나야 하나..”

고개를 힘없이 떨군 수연의 발걸음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무거웠다.
그것이 앨리스의 협박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금 떠오른 과거의 기억들 때문인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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