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캄피오네] 꿈 속에서 어떤 소녀와 다도회를 하는 이야기.

일반


글쓴이: 염라

등록일: 2014-01-12 12:04
조회수: 345
 
넓은 초원 위에 단 둘이, 자그마한 탁자와 의자만을 두고 서로 마주보면서 느긋하게 차를 마신다고 하는 행위.

한참 환상에 빠져있을 나이대 무렵의 여성진은 물론, 몇몇 남자들 또한 로맨틱한 모습으로 인해 동경할 법한 상황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현실 따윈 시궁창이다.


"여름에는 직사광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지, 겨울에는 찬 바람을 그대로 맞게 되지, 봄에는 여전히 사나운 바람에 이것저것 흩날려 정신없을 것이고, 가을에는 온갖 벌레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어 우리들의 혈육과 음식들을 탐낼 게 뻔하잖아."

"……. 자네는 좀더 로망을 가져야 돼!"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내 소감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녀가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래, 믿기진 않겠지만 난 지금 끝이 보이지않는 평원 한가운데에서 홍차주전자와 컵과 스콘(?!)까지 풍성하게 담긴 바구니가 얹혀진 테이블을 사이에 둔 체 저 소녀와 마주앉아있다.


"그래서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건 바로 눈치챈 겁니다만."

"……. 그걸 노리고 이 풍경을 연출하긴 했다만, 뭔가 좀더 신의 기대를 보답하는 반응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무리였네요."

소녀의 양볼이 통통하게 부풀어오른다. 아아, 하지만 제가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눈치챈 건 다른 곳인데요.

"내 이십평생 이렇게 여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은 0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

모테솔로에게 뭘 바라는 게냐! 동정어린 눈으로 그렇게 바라보지 마!



'따르지 않는 신', 신화 안에서만 머물러야할 신이 그 신화를 벗어나 현세로 내려온 이. 존재하는 것으로 주변을 재앙으로 몰고가는 '살아있는 재앙'.

전역 전날 나름 신세지던 부사관님에게 끌려가 죽어라 퍼마시고 숙취로 헤롱대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는 4시반 KTX를 잡아타고 의식을 잃었던 나에게, 이 소녀는 요즘 보기도 힘든 대여점에나 가야 있을 법한 판타지의 설정같은 걸 제법 거창하게 늘어놓았다.

가라사대, 자신은 '따르지 않는 히프노스'이며 그로 인해 이 KTX에 타고 있는 모든 인원들은-심지어 조종사와 객실승무원들까지!- 모두 잠들었으며 이대로 가면 3시간 내에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돌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가라사대, 그렇게 꿈 속에서 헤롱대다 죽기 싫으면 냉큼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문-초원 한가운데에 달랑 서있는 문이다!-으로 들어가 자신이 준비한 무대를 멋지게 클리어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라사대, 현실에서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마라.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


요즘 3류 영화에서도 써먹지 않을 듯한 플롯이다.

"거 나쁘구만?!"

스콘 하나가 믿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날아와 내 머리를 후려갈겼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걸! 꿈이니까!

"아니 요즘 인간은 어찌 되먹은 게야! 지금만 해도 문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어간 인간만 사백마흔넷이고 머리를 싸잡은 체 울고불고 현실도피하는 인간이 삼백아흔일곱일세! 거기다 이성을 잃고 날 쥐어 흔들길래 악몽에 처박아버린 게 아흔셋이지만! 자네처럼 나랑 멀쩡하게 마주앉아서 차나 마시고 있는 건 자네 한명 뿐이야!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네녀석이 왜 그리 간덩이가 처부은 게야?!"

"……. KTX 한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구나."

"지금 거기에 감탄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태평스럽게 흘린 내 감탄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음, '따르지 않는 히프노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음, 솔직히 지금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핀트가 어긋난 발언이긴 했다. 그러니

"그런데 '히프노스'는 남성신 아니였나?"

"자! 네!"


기어코 폭발하신 '따르지 않는 히프노스'께서 우리 사이에 있던 테이블을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하셨습니다.



수십분 후, 꿈 속이라 그런지 뒤집혔던 테이블이 원상복구되는데 단 1초도 안 걸렸지만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쳐 주전자 뚜껑이 열렸었던 '따르지 않는 히프노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데까지 홍차 열다섯잔이 소모되었고 스콘 쉰개가 희생되었다.

"……. 이제 좀 진정되셨수?"

"어디까지나 이건 자네가 잘못한 거야. 암, 그렇고말고."

거기에 홍차 한잔과 스콘 3개 추가. 스콘 안에 들어있던 잼의 단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미하게 미소짓는 게 귀엽다.

"……. 로리콘이었구만?"

"절대 아니라고 잡아떼지요."

그래, 나는 절대로 로리콘이 아니다. 그저 저 자칭 신이라고 하는 히프노스양이 입고있는 검은 고스로리복과 저 하얀 피부의 조화에 의한 내 내면의 욕구를 억누르지 못할 뿐이…….

"그게 로리콘이 아니고 뭔가?"

"……. 신사지요."

내 진중한 대답에 콧방귀를 뀌는 히프노스양이었다.


"그런데 히프노스씨?"

"왜 부르나?"

스콘의 희생수가 지금 막 일흔개를 돌파했습니다만……. 아, 이게 아니고.

"'따르지 않는 신'은 본래 '신화'에 기록되어 있던 신인 건 맞죠?"

"흠? 맞다만."

내 질문에 마지막 방울까지 깔끔하게 비운 홍차잔이 내려졌다. 음, 뭔가 신사로써 용납되지 않는 감정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만 얌전히 무시하자.

"'히프노스'는 남신 아니였습니까?"

"맞다만?"


……. 웨, 웨이러 미닛!

"되지도 않는 외국어 쓰지도 말게. 설마 그게 진심으로 궁금했던 건가?"

반안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히프노스가 오른손 검지를 잠깐 입술에 올리고 양눈을 감는다.

"그럼, 왜 이 몸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신들의 특성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지."

"트, 특성입니까?"

톡톡하고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검지로부터 애써 시선을 떼어 여전히 감고있는 히프노스의 눈을 바라본다. 음, 속눈썹 기시네요…….

"아, 특성이지. 뭐, 그렇다고 해도 이쪽에 발을 들이지 않을 너에게 그리 자세한 강의를 해봤자 무의미한가. 극단적으로 간략하게,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조차 접어두고 최대한 축약하자면……."

이번에는 왼손 검지가 테이블을 두드린다. 의외로 침착하지 못한 성격인 건가…….

"영웅으로써 떠받들어져, 괴물을 살해하고 무기와 보물을 얻어 그 힘으로써 민중을 이끈다. 이 것이 강철의 신격.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그 은혜를 거두어들이며 생명의 순환을 주관한다. 이 것이 대지의 신격이다."

"강철과, 대지?"

여전히 양눈을 감은 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히프노스. 그 머리의 움직임을 따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더 간단하게 말해, 빼앗고 지배하고 이끄는 것이 강철이요. 안고 지키며 이를 거두며 순리를 지키는 것이 대지이다. 이 특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으로도 이어져 강철과 연관된 것은 남성으로, 대지와 연관된 것은 여성으로써 다루어지는 법."

"쇠칼을 드는 건 남자고 밭을 일구는 건 여자라는 겝니까?"

"……. 너무 축약하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 설명하는 건 나다."

내 간략한 요약에 심통이 났는지 입술이 댓발은 늘어났다. 네네, 얌전히 입다물고 듣겠습니다.

"그럼 나 '히프노스'는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느냐?"

……. 뭔가 타이밍 참 안 맞네. 한숨을 내쉰 나는 갈 줄 모르고 방황하고있던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 대답을 해라, 이 것아."

"적어도 강철은 아니겠죠."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고개를 끄떡이는 히프노스……. 아니 이건 질문조차 아니였잖아?

"나 '히프노스'는 밤의 신 '닉스'와 어둠의 신 '에레보스'로부터 태어났다. 요컨데 어둠이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셈이지. 또한 나의 쌍둥이 형제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로다. 즉, 나는 어둠의 신격이며 동시에 명계의 신격이기도 하느니라."

죽음과 잠은 같지 않지만 비슷한 것.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신과 쌍둥이 형제로써 다루어졌다……. 라는 이야기를 대단히 점잖게 하고 계시는 히프노스였다.

"어둠과 명계의 신격은 대지의 신격과도 긴교하게 이어져있노니, 명계는 대지의 아래에 있고 어둠 저 멀리에 있다고 여겨진 것과도 관계가 있느노라. 그리하여 이 몸의 신격은 대지의 신격과 가까워, 낡은 속박을 뿌리치고 현신하였을 때 그 특성이 강하게 나타났기에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신화에 기술되기를 이 몸은 남성이라 하였으니, 아무리 속박을 뿌리쳤다하여도 우리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신화인바, 신화의 기술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니라."

"……."

뭔가 쓸데없이 길면서도 의미가 있는듯 없는듯한 설명이었다.

"요컨데, 간략하게 설명해서……. 어느쪽입니까?"

"……. 헛된 말을 늘어놓았구나. 에잉."

감겨있던 두 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나를 쏘아봤다. 아니 그 설명을 아무리 씹고뜯고맛봐도 정작 대답은 알 수가 없는데요?!

"그렇게 설명해도 모르겠다면 아예 직접 확인하거라!"

"아니, 뭘 직접 확인합니까!"

민첩한 움직임으로 버릇없게시리 앉고있던 의자에 두 발을 올리고 일어선 히프노스가 콧김을 세게 한번 부는가싶더니, 양손이 치마를 들어올?!


"이! 몸은! 남자이노라!"


"스, 스톱! 포, 포돌이가 옵니다!"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위로 다이빙해서 위험수역을 넘어가려는 히프노스의 양 손을 붙잡았다. 시선? 그야 테이블입니다, 네. 그러니 거기 포돌이님은 오시지 마시죠!

"……. 남자들끼리 아래 좀 보는 건데 뭐 그리 당황하느냐?"

"…….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세가지 있사온데, 그 중 첫번째가 서럽디서러운 군대요. 두번째가 취직 좀 하라는 잔소리요. 마지막 세번째가 아청아청하고 우는 포돌이옵니다."

"남자의 맨몸을 보고 흥분한다는 게냐? 아니 뭐 내가 한참 현역일 때는 그런 건 지극히 당연하긴 했다만 신의 몸을 보고 흥분한다니 참 대담하기도 한 녀석이구나."

"일단 전 그쪽 취향은 없사옵니다만 그런 걸로 치고 냉큼 옷매무새를 다듬으심이 나으실 듯 합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누군가 있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끌려갈 뻔했다.



"그나저나 현세까지 나온 보람이 있구나. 참 별난 녀석도 다 만나고 말이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려면 우선 네가 그 손을 놓아야되지 않겠느냐?', '아니아니, 지금 이 손을 놓으면 틀림없이 마지막까지 가실 속셈이시지요?! 절 유치장으로 보내실 속셈이십니까!' 같은 유치하지만 처절했던 말다툼 끝에 간신히 원상복구된 테이블과 의자에 서로 마주보고 앉은 우리 둘이었다.

"음? 갑자기 뜬금없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벌써 약속한 시간은 다가오는데 저 문을 다 통과한 녀석은 한 명도 없구나. 에잉, 요즘 녀석들은 나약해 빠져서 안 되는구나."

그 외모로 그런 말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벌써 시간이 다 되가는 모양이었다.

"뭐 네가 아니였더라면 헛물만 켤 뻔 했으니. 네 덕분에 그나마 별 꼴이라도 다 보는구나."

"뭘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겁니까."

내 대답에 갑자기 히프노스의 고개가 휙 돌아가더니 풋,이라고 하는 소리가 울려퍼져……. 잠깐, 지금 그거 비웃음인 건가?! 비웃음이야?!

"바깥의 시계로 이제 일곱시 이십분이노라. 그리고 저 나약한 것들은 고작 세개의 꿈 중에 두개도 못 빠져나가고 허우적대고 있구나. 단 한 녀석이라도 깨어난다면야 내가 진 것이니 문제가 없겠다만 지금 상태로는 무리노라, 무모하노라, 무지하기에 무도하구나."

"아니,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보이는데요. 내가 곧 일어날테니까."

여전히 고개를 돌린 상태였던 히프노스로부터 또 한번 풋이라고 하는 소리가 울렸다……. 두번이나 비웃었어?!

"뭐라도 준비해놓은 것이냐? 무리노라, 무법이노라, 무도니라, 참으로 무지하구나. 잠과 꿈의 신인 나로부터 고작 그딴 걸로 도망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냐?"

"진심으로. 앞으로 5분이면 모든 상황이 끝날테니 두고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커다래진 두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히프노스. 솔직히 말하겠다. 진심으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다.

"좋다. 어디 한번 그 허풍이 통하나보자."

"좋습니다. 내가 이기면 경품으로 잘 받아갈테니 두고보자구요!"


"진심으로 로리콘이더냐! 이 인생말종이!"



그리고……. <--눌러주세요.













내 귓가에 시끄러운 기상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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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강철호(23세), 말년휴가 복귀하는 순간 그동안 신세졌던 부사관님에게 끌려가 죽도록 술을 먹혔다.
이후 복귀는 했으나 숙취로 골골대다가 간신히 일어나 아침점호에 참석. 어그적어그적대면서 후임과 간부들에게 인사 마치고 기차역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4시.
간신히 집으로 가는 4시반 KTX를 타는데는 성공했으나 자신의 컨디션으론 목적지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직감,
눈물을 머금고 도착시간 5분 전인 7시 25분에 군대 기상 나팔 알람을 맞춰놓고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그가 의식을 잃은지 약 20분 후, 해당 KTX에 '따르지 않는 히프노스'가 강림. 이후 본문 참조.

참고로 그가 히프노스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한 건, 반 이상이 숙취로 인한 인사불성 탓이다.

사족. 이 결말에 대해서 판도라는 진심으로 이걸 이겼다고 판정해야되나 고민했으나, 주인공이 히프노스를 가지고가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그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인정했다……. 판도라 왈 [내가 살다살다 이런 걸 보게될 줄은 몰랐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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